중국 부자들이 에르메스 대신 고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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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가 필요 없어진 게 아니다 — 에르메스만으로는 부족해진 것이다
 
에르메스 대신, 여행, 건강, 자녀교육
숫자 하나로 시작해보자. 72%.
허브 오브 차이나(Hub of China)가 중국 1~3선 도시 소비자 4,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2026년에는 전통 명품 액세서리보다 장수 관련 제품 — 유기농 보충제, 기능성 식품, 웰니스 테크 — 에 우선 지출하겠다"고 답한 비율이 72%였다.
이 숫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에르메스 대신 보충제를 산다"고 읽으면 틀린다. 에르메스는 여전히 팔리고 있다. 정확하게 읽으면 이렇다. 에르메스는 사되, 그것만으로는 자신을 표현하기에 부족해진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지갑에서 나가는 돈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다.
물론 설문과 실제 행동은 다르다. "보충제에 더 쓰겠다"고 말해놓고 백화점 앞을 지나다 결국 지갑을 여는 사람은 항상 있다. 그래서 이 숫자 하나만으로는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나온 다른 조사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후룬 연구원(Hurun Research Institute)이 2026년 1월에 발표한 중국 럭셔리 소비자 조사를 보자. 470명의 고액자산가(HNWI)를 대상으로 한 결과가 꽤 의미심장하다. "명품 지출을 줄이겠다는 HNWI가 절반 이상. 시계 구매 열정은 눈에 띄게 하락. 중고 명품 관심도 현저히 감소." 대신 늘리겠다는 3대 항목은 무얼까? 바로 여행, 건강, 자녀 교육이었다.
베인&컴퍼니(Bain & Company)의 2025 중국 럭셔리 보고서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2025년 중국 개인 명품 시장이 3~5% 역성장했다. 시계가 14~17% 빠졌고, 가죽제품이 8~11% 빠졌다. 유일하게 성장한 카테고리는 뷰티, 그것도 초프리미엄 스킨케어와 향수뿐이었다.
세 개의 보고서가, 서로 다른 기관에서, 서로 다른 표본으로 조사해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명품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명품 위에 새로운 욕구의 경험이 올라오고 있다.
중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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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활력" 중국이 만든 새로운 럭셔리 문법
허브 오브 차이나(Hub of China)가 이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조용한 활력(Quiet Vitality, 内生活力)." 2024년이 "의미 있는 가치"의 해였고, 2025년이 "아웃도어 소셜 서클"의 해였다면, 2026년은 바로 "조용한 활력의 해"라는 것이다.
이게 단순히 "건강에 관심이 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욕구의 단계가 올라간 것이다. 명품 가방으로 "나는 이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다"를 보여주던 단계에서, 건강과 장수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를 보여주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물질적 과시에서 취향의 과시로, 다시 존재의 과시로. 에르메스를 버린 게 아니라, 에르메스 위에 한 층이 더 생긴 것이다.
한때 "996(아침 9시~밤 9시, 주 6일)" 노동문화와 로고 과시로 정의되던 시장에서, 새로운 플렉스는 "신체적·정신적 회복력"이 되었다. 가방과 시계는 돈이면 된다. 하지만 건강한 몸과 정서적 균형은 돈만으로 안 된다. 시간과 의지와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더 상위의 지위 표현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첫째, 음식과 약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야근 보충수(熬夜水)"라고 불리는 한약 토닉이나 스트레스 해소 스낵이 한때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2026년에는 일상 필수품이 되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간다. 웨어러블로 자기 몸의 미세 결핍을 추적하고, 그 데이터에 맞춰 맞춤 보충제를 사는 "정밀 영양(precision nutrition)"으로 진화하고 있다. 설문 응답이 아니라 실제 구매 행동에서 확인되는 변화다.
둘째, "마이크로 회복"이라는 개념이 퍼지고 있다. 골든위크까지 기다렸다가 리조트에 가는 게 아니다. 사무실 소프트웨어에 15분 명상 앱이 통합되고, 매장 공간에 "힐링 향기"가 도입되고. 짧고 강렬한 웰니스 버스트를 일상 곳곳에 끼워넣는 것이다. 이것을 제공하는 브랜드가 충성도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고 허브 오브 차이나(Hub of China)는 분석한다.
셋째, 한의학(TCM)이 장수의학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후룬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건강 관리가 '치료'에서 '예방 + 웰니스'로 전환되면서, 한의학 치료에 대한 관심이 유의미하게 상승했다." 이것은 서양의 바이오해킹과는 다른 결이다. 크라이오테라피와 NAD+ 주사가 아니라, 한약 토닉과 기공과 침술이 장수의 도구로 재해석되고 있다.
 
에르메스를 사던 사람들이 지금 함께 사고 있는 것들
후룬 보고서를 좀 더 들여다보면, 중국 고액자산가들의 일상이 꽤 구체적으로 보인다.
이들의 삶의 초점이 "신체적·정신적 균형"으로 이동하고 있다. 경험적 엔터테인먼트와 깊은 이완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여행 열정이 반등했지만, 방향이 다르다. 쇼핑 여행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경험"과 "심신 회복"을 찾는 여행으로 바뀌고 있다.
하루 커피 한 잔을 마시되, 아침에는 홍차, 오후에는 녹차와 무이암차(岩茶), 저녁에는 보이차와 백차를 마신다. 가족 식사에는 광둥요리, 친구 모임에는 일식을 선호한다. 이런 디테일이 중요한 이유는, 소비가 "물건"에서 "의례(ritual)"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차 한 잔도 시간대별로 다르게 고른다. 이것이 "조용한 활력"이 일상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후룬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장은 이것이다. "물질적 소비(시계, 보석, 수집품)는 대폭 감소하고, 서비스 경험 소비는 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같은 지갑에서 나가는 돈의 방향이 완전히 역주행 한 것이다.
인사이트 트렌즈 월드(Insight Trends World)는 이 현상을 "보이지 않는 럭셔리(Invisible Luxury)"라고 불렀다. "럭셔리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것이 되었다. 웰니스 리트릿, 장수 프로그램, 영적 코칭 같은 무형의 투자가 새로운 계급 구별의 표식이 되고 있다."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하지만 매주 장수 클리닉에 다니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안다. 에르메스가 "보이는 럭셔리"라면, 건강과 장수는 "보이지 않는 럭셔리"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상위에 있다고 느끼는 소비자가 늘고 있는 것이다.
 
서구 바이오해킹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중국의 장수 소비는 미국이나 두바이의 바이오해킹과 같은 방향이지만, 같은 모양은 아니다.
서양 모델은 "하이테크 + 하이프라이스"다. 전신 MRI, NAD+ 정맥주사, 크라이오테라피 챔버. 장비의 가격과 첨단성이 곧 프리미엄의 근거가 된다.
중국에서 부상하고 있는 것은 좀 다르다. 한의학(TCM)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면서 장수의학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한약 토닉, 약선 다이닝, 기공, 침술. 수천 년 된 전통이 "장수"라는 현대적 키워드를 입고 프리미엄 시장에 재등장하고 있다. 서양의 바이오해커가 크라이오 챔버에 들어가는 동안, 중국의 부유층은 보이차를 시간대별로 바꿔 마시고 있다. 접근 자체가 다르다.
물론 둘이 분리되어 있는 건 아니다. 클리니크 라 프레리(Clinique La Prairie)가 2026년 4월 베이징에 론제비티 허브(Longevity Hub)를 여는 것이 그 증거다. 스위스의 첨단 장수의학이 중국 시장에 직접 들어오고 있다. 중국 안지(安吉)에는 이미 이 브랜드의 헬스 리조트가 운영 중이다. 29개 빌라에서 "리버스 에이징(Reverse Aging)"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중국 시장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한 볼륨 때문이 아니다. 동서양 장수의학이 만나는 교차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첨단 진단 기술과 동양의 전통 양생 철학이 한 시장 안에서 경쟁하고, 때로는 결합하고 있다. 이 실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글로벌 장수의학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냉정하게 봐야 할 것들
여기서 한 발 물러서야 한다.
"설문에서 72%가 보충제를 우선시하겠다고 했다"와 "실제로 에르메스 매장 줄이 사라졌다"는 다른 이야기다. 중국 명품 시장이 역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 "욕구의 진화" 때문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배경을 보자. 중국 부동산 시장이 무너졌다. 중산층 자산이 20% 이상 가치를 잃었다. 청년 실업률이 16.5%에 달한다. 저축률이 올라가고 있다. 이런 거시경제적 환경에서 명품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욕구가 진화해서"만이 아니라 "쓸 수 있는 돈이 줄어서"이기도 하다.
베인&컴퍼니(Bain) 보고서도 이 점을 짚고 있다. "2025년 시장 위축은 소비자 신뢰가 전반적으로 약했던 가운데 발생했다." 경기가 좋아지면 명품 소비가 다시 반등할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진실은 아마 중간 어딘가에 있다. 경기 침체와 욕구의 진화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고, 둘을 깔끔하게 분리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건강과 장수에 대한 관심이 2020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낮다. 코로나를 경험한 세대가 건강의 가치를 잊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명품 소비가 돌아오더라도, 건강 소비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둘 다 산다. 다만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커니(Kearney)의 글로벌 럭셔리 보고서 2026이 흥미로운 관찰을 했다. "소비자들이 전통적 명품 정의 밖의 카테고리 — 여행, 웰니스, 심지어 바이오해킹 — 에서 더 큰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글로벌 현상이다. 중국은 이 전환이 가장 극적으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나고 있는 곳일 뿐이다.
 
한국이 여기서 읽어야 하는 것
첫째, 한국 의료관광의 고객이 바뀌고 있다. 중국 부유층이 한국에 오는 이유가 "쌍꺼풀 수술"에서 "프리미엄 건강검진"으로, 다시 "장수 프로그램"으로 진화하고 있다면, 한국이 제공하는 서비스도 따라가야 한다. 72%가 장수 제품에 우선 지출하겠다는 소비자들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한국의 한의학(KM)이 기회를 놓치고 있다. 중국에서 TCM이 장수의학 프레임 안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는 동안, 한국의 한의학은 여전히 "전통 치료" 포지셔닝에 머물러 있다. 한의학과 현대 장수의학을 결합한 프리미엄 프로그램은 한국에 아직 없다. 중국이 이 조합을 먼저 완성해버리면, 한국은 같은 뿌리를 가진 의학 자산으로 경쟁해야 하는데 출발선에서 이미 뒤처지게 된다.
셋째, "조용한 럭셔리"의 한국 버전이 한 단계 더 가야 한다. 한국에도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트렌드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조용한 럭셔리는 아직 "로고 없는 옷"에 가깝다. 중국의 "조용한 활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건강과 장수가 정체성의 표현이 되고 있다. 옷에서 몸으로, 외면에서 내면으로, "무엇을 가졌는가"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로. 한국의 프리미엄 시장도 이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버킨백 위에 있는 욕망
에르메스 버킨백의 가격은 해마다 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팔리고 있다. 사라진 게 아니다. 다만 버킨백만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버킨백은 "나는 이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다"를 말해준다. 하지만 중국의 부유층이 지금 보여주고 싶은 것은 그 다음 단계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 유기농 보충제를 고르고, 웨어러블로 자기 몸을 추적하고, 시간대별로 차를 바꿔 마시고, 장수 클리닉에서 생물학적 나이를 관리하는 사람. 이것은 돈만으로는 안 된다. 지식과 의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 상위의 럭셔리로 인식되고 있다.
"무엇을 가졌는가"에서 "어떤 사람인가"로. 럭셔리의 정의가 한 단계 올라가고 있다. 가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방 위에 건강이, 건강 위에 정체성이 쌓이고 있다. 욕구가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진화의 진원지가 세계 최대의 명품 시장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이 바뀌면 세계가 따라온다. 지난 20년간 명품 시장에서 그래왔듯이.
다만 이번에 중국이 이끄는 방향은, 매장이 아니라 클리닉을 향하고 있다.
  
이동철 | 하이엔드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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