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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의 언어'와 'AI의 언어' 이중언어 과학자를 키우는 싱가폴

의사에게 코딩을 가르칠 것인가, 프로그래머에게 세포를 가르칠 것인가. 이 질문 자체가 이미 낡았다. 싱가포르는 아예 다른 답을 내놓았다. 처음부터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2026년 4월 출범하는 RIE2030 계획의 핵심에는, 370억 싱가포르달러(약 38조 원)라는 거대한 예산보다 더 눈여겨볼 키워드가 하나 있다. '이중언어형(bilingual) 과학자'. AI의 문법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생명과학의 맥락을 읽는 인재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먼저 신약 하나가 탄생하는 과정을 떠올려봐야 한다.


약 하나를 만드는 데 10년이 걸렸던 이유
전통적인 신약개발은 이런 식이다. 수천 개의 후보물질을 하나하나 실험실에서 테스트하고, 그중 가능성 있는 몇 개를 골라 동물실험을 하고, 다시 그중 극소수만 인간 대상 임상시험에 들어간다. 이 과정이 보통 10~15년, 비용은 20억 달러 이상이 든다. 성공 확률은 채 10%가 되지 않는다.
AI가 이 풍경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지금은 컴퓨터가 하루 만에 수십만 개의 분자 구조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릴리(Eli Lilly)는 엔비디아와 손잡고 분자 시뮬레이션 전용 슈퍼컴퓨터를 만들었고, 홍콩에서 IPO한 AI 신약개발 기업 Insilico Medicine은 AI로 설계한 신약 후보를 이미 임상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업계 임원의 절반 가까이가 "AI가 우리 회사의 최우선 전략"이라고 답하는 시대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병목이 나타난다. AI가 아무리 빨라져도, 그 결과를 해석하는 사람이 AI와 생물학을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구글 번역기가 아무리 좋아져도, 영어 원문의 뉘앙스를 모르면 번역 결과가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AI가 "이 분자가 암세포에 결합할 확률이 87%"라고 출력했을 때, 그 87%가 실제 인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 — 바로 그 사람이 지금 가장 부족하다.


싱가포르가 말하는 '이중언어'의 진짜 뜻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싱가포르는 영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다. 그래서 '이중언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언어 교육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RIE2030이 말하는 bilingual은 전혀 다른 의미다.
하나의 언어는 AI·데이터·컴퓨팅이다.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대규모 데이터를 다루고, 머신러닝 모델을 훈련시키는 능력. 또 하나의 언어는 특정 과학 분야의 전문성이다. 세포가 어떻게 분열하는지, 단백질이 왜 특정 형태로 접히는지, 임상시험 데이터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감추는지 아는 능력말이다. 
보통은 이 두 가지가 다른 사람의 머리에 들어 있다.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한 AI 엔지니어가 한쪽에 있고, 생물학 박사가 다른 한쪽에 있다. 둘이 같은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회의실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AI 엔지니어는 "손실함수를 최적화했다"고 말하고, 생물학자는 "그래서 이 약이 간에서 어떻게 대사되는데?"라고 묻는다. 통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통역 과정에서 시간, 맥락, 직관이 모두 손실된다.
싱가포르의 답은 명쾌하다. 통역관을 고용하지 말고, 처음부터 두 언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사람을 키우자는 것이 그들의 답이다. 


인구 600만 도시국가의 무모해 보이는 도전
솔직히, 이 전략은 무모해 보인다. AI를 제대로 다루려면 컴퓨터과학·수학·통계학에서 최소 석사 이상의 훈련이 필요하다. 바이오 분야의 도메인 전문가가 되려면 생물학·화학·의학에서 박사급 훈련이 필요하다. 둘 다 하려면? 시간과 재능이 이중으로 든다. 그런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극소수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인구 600만의 도시국가다. 미국(3억 3천만)이나 중국(14억)처럼 대규모 인력 풀에서 확률적으로 '이중언어형 천재'를 걸러낼 수 없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양(量)이 아닌 질(質)의 게임을 선택했다. 소수의 핵심 인재가 연구의 방향을 설계하고, AI 인프라가 나머지 실행을 증폭하는 구조다.
이것이 RIE2030의 예산이 단순한 연구비가 아니라 '환경 설계비'인 이유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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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가 준비한 세 장의 카드
첫 번째 카드는 AI를 연구의 '운영체제'로 만드는 것이다. RIE2030은 새로운 국가연구소를 설립해 도메인 특화 AI 모델, 물리 정보 기반 AI(physics-informed AI), GPU부터 양자-고전 하이브리드 시스템까지 아우르는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한다. 목표는 기존에 수년 걸리던 연구 사이클을 하루 단위로 압축하는 것이다. 개별 연구실이 AI 도구를 '빌려 쓰는' 수준이 아니라, 전체 연구 생태계가 AI 위에서 돌아가는 구조를 만든다는 뜻이다.
두 번째 카드는 인재 파이프라인의 양방향 설계다. NRF(국가연구재단) 박사후 어워드, 해외 대학원 장학금이 '밖으로 보내는' 경로라면, Tech.Pass(기술 인재 비자)와 Tech@SG(급성장 기업용 취업비자)는 '안으로 끌어오는' 경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훈련받은 연구자가 해외 딥테크 스타트업에서 창업 경험을 쌓고 돌아오는 프로그램이다. 논문만 쓰는 과학자가 아니라, 시장을 아는 과학자를 만들겠다는 설계다. 모더나를 탄생시킨 벤처 빌더 Flagship Pioneering이 A*STAR과 공동으로 최대 1억 싱가포르달러를 투입해 싱가포르에 아태 허브를 열기로 한 것도 이 맥락이다.
세 번째 카드는 '국가적 베팅'의 방향 설정이다. RIE2030은 두 개의 플래그십과 두 개의 그랜드 챌린지를 발표했다. 첫 번째 그랜드 챌린지의 이름이 흥미롭다 — '건강한 장수의 극대화(Maximising Healthy and Successful Longevity)'.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싱가포르에서, 뇌 건강 유지와 인지 기능 저하 지연을 연구한다. 이것이야말로 AI와 바이오가 정확히 교차하는 영역이다. 수백만 명의 건강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노화의 패턴을 찾고, 그 패턴에 개입할 수 있는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 '이중언어형 과학자'가 가장 필요한 전장(戰場)이기도 하다.


왜 하필 지금인가, 미국이 만든 빈자리를 차지한 싱가폴
타이밍도 절묘하다. 세계 최대 생명과학 연구 지원기관인 미국 NIH의 예산이 약 40% 삭감되었다. 바이오시큐어법(Biosecure Act)으로 중국 바이오텍 기업과의 협력에 제동이 걸렸다. 글로벌 바이오텍 자본이 "미국만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오래된 전제를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싱가포르는 이 틈을 세 가지 무기로 파고든다. 정치적 중립성(미-중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포지션), 세계 14위의 지식재산 보호 체계, 미국·EU와 정합성 높은 규제 프레임워크. 세계 10대 제약사 중 8곳이 이미 싱가포르에 아태 지역본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 포지셔닝의 결과물이다.
Bain & Company는 이를 "글로벌 혁신 전략의 재정렬"이라고 요약했다. 미국이 문을 좁히는 사이, 싱가포르는 문을 활짝 열고 "여기로 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바이오폴리스 20년,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
물론 장밋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는 2000년부터 바이오를 '국가 경제의 네 번째 기둥'으로 선언하고, 2003년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바이오폴리스(Biopolis) R&D 허브를 열었다. 20년 넘게 수백억 달러를 투입했다. 그 결과 바이오의학 제조 산출액이 2023년 기준 381억 싱가포르달러에 달하고, 현지 바이오텍 기업 수가 2015년 이후 4배로 늘었다.
하지만 '대형 성공 스토리'는 아직 부족하다. CAR-T 세포치료 스타트업 Tessa Therapeutics가 2023년 자금난으로 청산했고, ASLAN Pharma도 2024년 같은 길을 걸었다. 동남아 최초의 바이오텍 유니콘 MiRXES가 홍콩 증시에 상장한 것이 겨우 2025년이다. "테크에서는 몇 년이면 유니콘이 나오지만, 신약은 환자에게 닿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리는 긴 게임"이라는 A*STAR 측의 말은 변명이 아니라 산업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다.
RIE2030은 이 '긴 게임'의 속도를 바꾸기 위한 전략이다. 게임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 — 특히 '누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가' — 을 재설계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이 이 이야기에서 캐치할 것
한국은 GDP 대비 R&D 투자 비율에서 이미 세계 최상위권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글로벌 CDMO(위탁개발생산) 시장의 강자이고, 셀트리온은 바이오시밀러 분야를 개척했다.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부족한 것은 싱가폴처럼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말하는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이다. 한국의 대학 시스템은 학과 칸막이가 높다. 생물학과 학생이 컴퓨터과학 수업을 듣는 것은 가능하지만, 두 분야를 동등한 깊이로 훈련받는 융합 경로는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결국 생물학자는 AI를 '남이 만든 도구'로 빌려 쓰고, AI 엔지니어는 바이오 데이터를 '의미를 모르는 숫자'로 처리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싱가포르의 RIE2030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은 "예산을 더 쓸 것인가"가 아니다. "어떤 사람을 만들 것인가"다. AI를 '활용하는' 바이오 과학자를 원하는가, AI로 '사고하는' 바이오 과학자를 원하는가. 전자는 소프트웨어 교육이다. 후자는 인재 아키텍처의 재설계다. 싱가포르는 후자에 38조 원을 걸었다.


연구에 있어 가장 비싼 인프라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
싱가포르가 20년 전에 바이오폴리스라는 건물을 지었을 때, 많은 나라가 부러워했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첨단 연구단지, 50개 이상의 기업이 입주한 원스톱 R&D 허브.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싱가포르 스스로가 깨달은 것이 있다. 가장 비싼 인프라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 건물은 돈이면 지을 수 있지만, AI의 출력을 해석하고 그것을 생물학적 가설로 변환한 뒤 다시 AI 모델의 입력으로 되돌릴 수 있는 머리는 돈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RIE2030의 본질은 바이오텍 투자 계획이 아니다. 가장 희소한 자원 —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말하는 과학자' — 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머물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프로젝트다. 그리고 그 환경을 먼저 완성하는 나라가, 다음 20년의 바이오텍을 지배한다.


싱가폴이 보여주는 연구 혁신 5 Key Signals
Signal 1 | 370억 싱가포르달러의 정체 GDP 1%, 전회 대비 32% 증액. 하지만 핵심은 금액이 아니라 '인재 환경 설계'에 대한 방향 전환.
Signal 2 | '이중언어형 과학자'란 AI 알고리즘 + 바이오 도메인 전문성을 동시에 갖춘 연구자. 도구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도구와 문제를 동시에 설계하는 사람.
Signal 3 | 미국이 만든 빈자리 NIH 예산 40% 삭감, 바이오시큐어법 시행. Flagship Pioneering(모더나 배후)의 싱가포르 허브 설립이 자본 이동의 신호탄.
Signal 4 | 그랜드 챌린지 — 건강한 장수 초고령사회 대응을 AI-바이오 교차점에 정밀 배치. 이중언어형 과학자가 가장 필요한 전장.
Signal 5 | 한국에의 질문 돈은 충분하다. 부족한 것은 두 언어를 동시에 훈련하는 융합 경로. 도구 교육이 아니라 인재 아키텍처의 재설계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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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안 | 하이엔드전략연구소장 | hesi.research@gmail.com ⓒ 하이엔드전략연구소(HESI) & 하이엔드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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