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마 피게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로열오크. 팔각형 베젤. 스틸 스포츠 워치. 그런데 2026년 첫 신작으로 이 브랜드가 꺼내든 건 전혀 다른 시계다. 바늘이 없다. 둥글지도 않다. 스포티하지도 않다. 대신 작은 창 두 개에서 숫자가 뜨고, 정시마다 '톡' 하고 다음 숫자로 넘어간다. 71,200달러짜리 핑크 골드 드레스 워치. 이름은 네오 프레임 점핑 아워. 드레스 워치의 시대가 다시오는 걸까?
97년 전 시계를 다시 꺼낸 이유
이 시계의 원형은 1929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오데마 피게가 14개만 제작한 레퍼런스 1271. 네 가지 소재로 만들어졌고, 거의 전부가 그해 10월 대공황 직전에 팔렸다. 유일한 플래티넘 모델 한 점이 오데마 피게 박물관에 남아 있다.
1920년대에는 손목시계가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둥글어야 한다는 규칙도, 바늘이 두 개 있어야 한다는 규칙도 없었다. 작은 창에 숫자를 띄우고 한 시간마다 다음 숫자로 바꾸는 방식도 당시에는 여러 실험 중 하나였을 뿐이다. 오데마 피게는 1921년부터 이 방식을 시도했다. 카르티에의 유명한 탱크 아 기셰보다 8년 앞선다.
네오 프레임은 이 97년 전 시계를 '복제'한 게 아니다. 그때 열어뒀다가 닫힌 질문, 바늘 없이 시간을 읽는 방식을 2026년의 기술로 다시 연 것이다.
바늘이 사라지면 생기는 일
보통 시계는 다이얼 위에 바늘 두 개가 돌아간다. 점핑 아워는 이걸 전부 걷어낸다. 대신 두 개의 작은 창만 남긴다. 하나에는 시간, 하나에는 분이 뜬다.
바늘이 없으면 다이얼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채울 필요가 없어진다. 장식할 이유도 없어진다. 네오 프레임의 검은 사파이어 다이얼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오데마 피게 로고조차 빛의 각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진다. 시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대신 숨는다. 이것이 이 시계의 미학이다. 조용한 시계.
그 안에는 오데마 피게 최초의 자동 점핑 아워 무브먼트, 칼리버 7122가 들어간다. 로열오크 '점보'의 엔진을 기반으로 점핑 아워 모듈을 얹은 것이다. 시간 디스크는 티타늄, 분 디스크는 알루미늄. 가벼운 소재를 써서 숫자가 넘어갈 때 에너지 손실을 줄였다. 손목에 충격이 가해져도 시간이 오작동하지 않도록 특허받은 쇼크 업소버도 넣었다. 두께 8.8mm, 파워리저브 52시간. 조심스럽게 모셔둘 시계가 아니라 매일 차는 시계로 만든 것이다.
스포츠 워치 시대에 드레스 워치를 내놓는 배짱
지금 시계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건 스포츠 워치다. 로열오크, 노틸러스, 서브마리너. 크고, 튼튼하고, 스틸 브레이슬릿에 방수 100미터 이상. 대기자 명단에 이름 올리고 프리미엄 붙여서 사는 시계들이 전부 이 카테고리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스포츠 워치를 차기 시작하니까, 스포츠 워치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오버사이즈 후디가 유행하면 결국 잘 재단된 수트가 돌아오듯, 시계도 같은 사이클을 타고 있다. 카르티에 탱크, JLC 레베르소, 브레게 클래식 같은 얇고 조용한 시계들이 다시 대화의 중심으로 오고 있다.
2026년 시계 트렌드를 요약하면 이렇다. 케이스가 작아지고 있다. 36~39mm가 다시 주류가 된다. 두께가 얇아지고 있다. 10mm 이하가 매력이 된다. 레크탱귤러(직사각형) 케이스가 다시 나오고 있다. 현대 손목시계의 98%가 원형인 시장에서, 네모난 시계를 차는 것 자체가 취향의 선언이 된다.
네오 프레임은 이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다. 32.6 × 34mm, 두께 8.8mm, 핑크 골드에 가죽 스트랩. 스포츠 워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시계다.
파도가 바뀔 때 이미 그 자리에 있는 법
오데마 피게 입장에서 이건 꽤 대담한 선택이다. 로열오크만 계속 만들어도 매출은 나온다. 굳이 레크탱귤러 드레스 워치를 새 컬렉션으로 론칭할 이유가 없다. 안전하게 가려면 로열오크에 새 다이얼 색을 입히면 된다. 실제로 2026년 신작에도 말라카이트 다이얼 로열오크, 블랙 세라믹 오프쇼어가 포함되어 있다. 잘 팔리는 공식은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옆에 네오 프레임을 세웠다. 팔각형이 아닌 직사각형. 스틸이 아닌 핑크 골드. 바늘이 아닌 점핑 아워를 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품을 출시한 것. 로열오크와 공유하는 디자인 요소가 단 하나도 없는 시계를 내놓고, 이것을 새 컬렉션의 시작이라고 선언했다. 추가 모델도 예고했다.
이것은 브랜드의 깊이를 만드는 일이면서 동시에, 유행의 물결이 바뀌는 것을 대비하는 일이다. 스포츠 워치의 시대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건 업계 누구나 안다. 문제는 파도가 바뀔 때 그 자리에 서 있느냐다. 지금 네오 프레임을 론칭하고 컬렉션을 예고한다는 건, 드레스 워치의 파도가 왔을 때 오데마 피게가 이미 그 자리에 있겠다는 선언이다. 잘 팔릴 때 준비하는 브랜드와, 안 팔리기 시작한 뒤에야 움직이는 브랜드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오데마 피게 = 로열오크'가 되는 순간, 로열오크 없는 오데마 피게는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네오 프레임이 하는 일은 그 종속을 끊는 것이다. 팔각형 밖에도 오데마 피게가 있다는 것을 지금, 로열오크가 가장 잘 팔리는 지금 증명해두는 것. 위기가 오기 전에 대안을 만드는 브랜드만이 다음 파도를 탈 수 있다.
조용한 시계의 시대
스마트폰 시대에 시계의 본질적 기능, 시간 확인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남은 것은 '어떤 방식으로 시간과 관계 맺는가'라는 미학적 선택이다. 바늘 두 개가 도는 방식이 있고, 숫자가 창에서 톡 하고 넘어가는 방식이 있다. 어떤 걸 손목에 올리느냐는 결국 취향의 문제다.
네오 프레임 점핑 아워는 '더 크고, 더 튼튼하고, 더 눈에 띄는 것'이 지배하던 시장에서 '더 작고, 더 얇고, 더 조용한 것'의 가치를 다시 꺼내든 시계다. 그리고 그 조용한 가치를 가장 설득력 있게 말하는 방법은, 97년 전 아카이브를 열어 2026년의 기술로 다시 짓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오리지널러티를 강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오데마 피게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로열오크. 팔각형 베젤. 스틸 스포츠 워치. 그런데 2026년 첫 신작으로 이 브랜드가 꺼내든 건 전혀 다른 시계다. 바늘이 없다. 둥글지도 않다. 스포티하지도 않다. 대신 작은 창 두 개에서 숫자가 뜨고, 정시마다 '톡' 하고 다음 숫자로 넘어간다. 71,200달러짜리 핑크 골드 드레스 워치. 이름은 네오 프레임 점핑 아워. 드레스 워치의 시대가 다시오는 걸까?
97년 전 시계를 다시 꺼낸 이유
이 시계의 원형은 1929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오데마 피게가 14개만 제작한 레퍼런스 1271. 네 가지 소재로 만들어졌고, 거의 전부가 그해 10월 대공황 직전에 팔렸다. 유일한 플래티넘 모델 한 점이 오데마 피게 박물관에 남아 있다.
1920년대에는 손목시계가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둥글어야 한다는 규칙도, 바늘이 두 개 있어야 한다는 규칙도 없었다. 작은 창에 숫자를 띄우고 한 시간마다 다음 숫자로 바꾸는 방식도 당시에는 여러 실험 중 하나였을 뿐이다. 오데마 피게는 1921년부터 이 방식을 시도했다. 카르티에의 유명한 탱크 아 기셰보다 8년 앞선다.
네오 프레임은 이 97년 전 시계를 '복제'한 게 아니다. 그때 열어뒀다가 닫힌 질문, 바늘 없이 시간을 읽는 방식을 2026년의 기술로 다시 연 것이다.
바늘이 사라지면 생기는 일
보통 시계는 다이얼 위에 바늘 두 개가 돌아간다. 점핑 아워는 이걸 전부 걷어낸다. 대신 두 개의 작은 창만 남긴다. 하나에는 시간, 하나에는 분이 뜬다.
바늘이 없으면 다이얼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채울 필요가 없어진다. 장식할 이유도 없어진다. 네오 프레임의 검은 사파이어 다이얼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오데마 피게 로고조차 빛의 각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진다. 시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대신 숨는다. 이것이 이 시계의 미학이다. 조용한 시계.
그 안에는 오데마 피게 최초의 자동 점핑 아워 무브먼트, 칼리버 7122가 들어간다. 로열오크 '점보'의 엔진을 기반으로 점핑 아워 모듈을 얹은 것이다. 시간 디스크는 티타늄, 분 디스크는 알루미늄. 가벼운 소재를 써서 숫자가 넘어갈 때 에너지 손실을 줄였다. 손목에 충격이 가해져도 시간이 오작동하지 않도록 특허받은 쇼크 업소버도 넣었다. 두께 8.8mm, 파워리저브 52시간. 조심스럽게 모셔둘 시계가 아니라 매일 차는 시계로 만든 것이다.
스포츠 워치 시대에 드레스 워치를 내놓는 배짱
지금 시계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건 스포츠 워치다. 로열오크, 노틸러스, 서브마리너. 크고, 튼튼하고, 스틸 브레이슬릿에 방수 100미터 이상. 대기자 명단에 이름 올리고 프리미엄 붙여서 사는 시계들이 전부 이 카테고리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스포츠 워치를 차기 시작하니까, 스포츠 워치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오버사이즈 후디가 유행하면 결국 잘 재단된 수트가 돌아오듯, 시계도 같은 사이클을 타고 있다. 카르티에 탱크, JLC 레베르소, 브레게 클래식 같은 얇고 조용한 시계들이 다시 대화의 중심으로 오고 있다.
2026년 시계 트렌드를 요약하면 이렇다. 케이스가 작아지고 있다. 36~39mm가 다시 주류가 된다. 두께가 얇아지고 있다. 10mm 이하가 매력이 된다. 레크탱귤러(직사각형) 케이스가 다시 나오고 있다. 현대 손목시계의 98%가 원형인 시장에서, 네모난 시계를 차는 것 자체가 취향의 선언이 된다.
네오 프레임은 이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다. 32.6 × 34mm, 두께 8.8mm, 핑크 골드에 가죽 스트랩. 스포츠 워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시계다.
파도가 바뀔 때 이미 그 자리에 있는 법
오데마 피게 입장에서 이건 꽤 대담한 선택이다. 로열오크만 계속 만들어도 매출은 나온다. 굳이 레크탱귤러 드레스 워치를 새 컬렉션으로 론칭할 이유가 없다. 안전하게 가려면 로열오크에 새 다이얼 색을 입히면 된다. 실제로 2026년 신작에도 말라카이트 다이얼 로열오크, 블랙 세라믹 오프쇼어가 포함되어 있다. 잘 팔리는 공식은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옆에 네오 프레임을 세웠다. 팔각형이 아닌 직사각형. 스틸이 아닌 핑크 골드. 바늘이 아닌 점핑 아워를 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품을 출시한 것. 로열오크와 공유하는 디자인 요소가 단 하나도 없는 시계를 내놓고, 이것을 새 컬렉션의 시작이라고 선언했다. 추가 모델도 예고했다.
이것은 브랜드의 깊이를 만드는 일이면서 동시에, 유행의 물결이 바뀌는 것을 대비하는 일이다. 스포츠 워치의 시대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건 업계 누구나 안다. 문제는 파도가 바뀔 때 그 자리에 서 있느냐다. 지금 네오 프레임을 론칭하고 컬렉션을 예고한다는 건, 드레스 워치의 파도가 왔을 때 오데마 피게가 이미 그 자리에 있겠다는 선언이다. 잘 팔릴 때 준비하는 브랜드와, 안 팔리기 시작한 뒤에야 움직이는 브랜드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오데마 피게 = 로열오크'가 되는 순간, 로열오크 없는 오데마 피게는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네오 프레임이 하는 일은 그 종속을 끊는 것이다. 팔각형 밖에도 오데마 피게가 있다는 것을 지금, 로열오크가 가장 잘 팔리는 지금 증명해두는 것. 위기가 오기 전에 대안을 만드는 브랜드만이 다음 파도를 탈 수 있다.
조용한 시계의 시대
스마트폰 시대에 시계의 본질적 기능, 시간 확인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남은 것은 '어떤 방식으로 시간과 관계 맺는가'라는 미학적 선택이다. 바늘 두 개가 도는 방식이 있고, 숫자가 창에서 톡 하고 넘어가는 방식이 있다. 어떤 걸 손목에 올리느냐는 결국 취향의 문제다.
네오 프레임 점핑 아워는 '더 크고, 더 튼튼하고, 더 눈에 띄는 것'이 지배하던 시장에서 '더 작고, 더 얇고, 더 조용한 것'의 가치를 다시 꺼내든 시계다. 그리고 그 조용한 가치를 가장 설득력 있게 말하는 방법은, 97년 전 아카이브를 열어 2026년의 기술로 다시 짓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오리지널러티를 강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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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철 | 하이엔드캠프 대표 | highendcam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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