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는 자동차 회사인가. CEO 베네데토 비냐의 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자동차도 만드는 럭셔리 회사입니다(We are a luxury company that is also doing cars)." '자동차도'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차가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선언이다.
이건 겸손이 아니다. 냉정한 산술이다.
왜 그들은 바뀌어야 했나
13,752대의 딜레마
페라리가 2024년에 판 차는 13,752대. 그런데 시가총액은 약 750억 달러로, 수백만 대를 찍어내는 포드나 GM의 1.5배에 달한다. 이 비정상적인 밸류에이션은 단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희소성.
창업자 엔초 페라리는 "시장이 원하는 것보다 한 대 적게 만들어라"는 원칙을 세웠고, 경영진은 지금도 이 원칙을 따른다. 생산을 제한해 대기 명단을 유지하고, 리세일 가치를 높이며, 브랜드의 신비감을 강화하는 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차를 더 만들면 단기 매출은 오르지만 희소성이 무너진다. 희소성이 무너지면 페라리는 그냥 '비싼 차'가 되고, '비싼 차'는 가격 경쟁에 노출된다. 그 순간 750억 달러의 근거가 사라진다. 차는 더 만들 수 없다. 그런데 투자자는 성장을 원한다. 이 모순을 푸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차가 아닌 곳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엔진이 사라지는 시대
더 근본적인 위기도 있다. 페라리의 핵심 감성 — V12 엔진 사운드, 기어 변속의 충격, 배기음의 진동 — 은 모두 내연기관에서 나온다. 페라리는 2026년 말까지 판매 차량의 약 60%를 하이브리드 또는 전기차로 전환할 계획이지만, 소리와 감정, 드라이빙 경험을 타협하지 않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 모터가 V12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엔진이 바뀌어도 살아남는 것은 '제품의 성능'이 아니라 '브랜드의 세계관'이다. 패션, 레스토랑, 뮤지엄, 부티크. 이 모든 접점에서 '페라리다움'이 작동하고 있다면, 엔진이 사라진 뒤에도 브랜드는 산다. 지금의 라이프스타일 확장은 사업 다각화가 아니다. 엔진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험이다.
85만 명이 13,752명보다 중요한 역설
페라리 연차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우리가 하는 일의 핵심 부분이다. 많은 팬에게 이것이 페라리 세계로 들어오는 진입점이 되기 때문이다." 2024년 마라넬로와 모데나의 페라리 뮤지엄 방문객은 85만 명 이상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85만 명. 연간 차 구매자의 60배다. 이들 대부분은 페라리를 살 수 없다. 하지만 뮤지엄에서 감동받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부티크에서 가방을 산다. 이들의 소비가 매출이 되는 동시에, 이들의 열망이 페라리를 둘러싼 문화적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가 다시 차의 프리미엄을 높인다.
"페라리의 브랜드가 특별한 건 인지도가 아니라 '허락(permission)'이다. 가격을 올리고 접근을 제한하면서도 수요가 늘어난다. 이것이 럭셔리 경제학의 본질이다." 이 '허락'은 열망의 층위가 두꺼울수록 견고해진다. 차만 파는 브랜드는 열망이 한 겹이다. 패션, 레스토랑, 뮤지엄, 부티크까지 경험할 수 있는 브랜드는 여러 겹이다. 층위가 두꺼울수록 가격 프리미엄은 공고해진다.
정리하면 세 가지다. 차는 더 만들 수 없는데 성장해야 한다. 엔진이 사라져도 살아남아야 한다. 차를 살 수 없는 팬까지 브랜드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 세 개의 압력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 페라리는 '차를 파는 회사'에서 '페라리다움을 파는 회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떻게 바뀌었나
먼저 줄였다
과거 페라리의 '라이프스타일'은 솔직히 형편없었다. 공항 면세점에서 로고 박힌 열쇠고리와 볼펜을 파는 수준. 브랜드를 소모하는 행위였다. 페라리는 2018년 이후 라이선스 수를 대폭 줄이고, 유통 네트워크를 리뉴얼하며, 럭셔리 업계 출신 인재를 영입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핵심은 '줄인다'는 것이다. 로고 갖다 붙이는 라이선스를 줄이고, 직접 기획하고 직접 파는 구조로. 단기적으로는 매출을 포기하는 결정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가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공장 조립 라인 위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2019년 아르마니·돌체앤가바나 출신의 로코 이아노네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외부에 라이선스를 주는 대신 자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페라리의 디자인 언어를 패션으로 번역하는 구조를 세운 것이다.
첫 패션쇼는 2021년, 마라넬로 본사 V12 조립 라인 위에서 열렸다. 이 장소 선택이 의미심장하다. 파리나 밀라노의 화려한 공간이 아니라, 엔진이 조립되는 공장이다. '이 옷은 엔진을 만드는 손에서 나왔다'는 메시지. 옷과 차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다. 이후 매 시즌 밀라노 패션위크 정규 무대에 서고 있고, 2026년 가을 컬렉션으로 이아노네의 10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시범 사업이었다면 3시즌 만에 접었을 것이다. 10시즌이면 본업이다.
마이애미 그랑프리 기간에는 파에나 호텔을 통째로 빌려 페라리 오너를 위한 갈라를 열었는데, 최대 3만 5,000유로(약 5,000만 원)짜리 데미쿠튀르 의상 30벌이 완판됐다. 자동차 행사에서 옷이 팔린다. 세계관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식탁 위에 브랜드를 올렸다
마라넬로 본사 앞 리스토란테 카발리노는 세계 최고의 셰프 마시모 보투라와 협업해 2021년 재개장했고, 2025년 11월 미슐랭 1스타를 획득했다. 이 공간 자체가 전설이다. 1950년 엔초 페라리가 공장 식당으로 열었고, 여기서 니키 라우다와 점심을 먹고, 그랑프리를 지켜보고, 고객을 접대했다. 그 역사적 공간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테이스팅 메뉴는 페라리 슈퍼카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각 코스에 288 GTO, F40, F50, 라페라리, F80 같은 차 이름이 붙어 있으며, 페라리 디자인센터와 공동 개발했다. 디저트 중 하나는 실제 페라리 차체 금형을 본뜬 몰드로 만들어진다. 이건 끼니가 아니라 감각의 기억이다.
왜 하필 레스토랑인가. 차는 수년에 한 번 산다. 옷은 시즌에 한두 번 산다. 레스토랑은 수시로 간다. 접촉 빈도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식사는 반드시 '함께 하는 경험'이다. 혼자 차를 모는 것과 달리, 식사는 동행자와 공유된다. 한 사람의 감동이 두 사람, 네 사람으로 번진다. 가장 낮은 비용으로 가장 넓은 감정적 파급력을 만드는 접점이 식탁이다.
매장은 늘리되, 주소로 승부한다
현재 전 세계 14개 페라리 패션 매장. 뉴욕과 마이애미에 신규 매장이 예정되어 있고, 로마 매장은 스페인 계단으로 이전한다. 런던도 파이프라인에 있다. 14개. SPA 브랜드라면 한 도시에 낼 숫자다. 그런데 페라리는 전 세계에 14개만 둔다.
"매장 수가 차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올바른 위치가 차이를 만든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로마 스페인 계단. 뉴욕. 마이애미. 런던. 매장 자체가 브랜드 메시지다. 연간 13,752대만 만드는 브랜드가 매장을 수백 개 낼 수는 없다. 물건의 희소성과 접점의 희소성이 동기화되어야 세계관이 유지된다.
모든 접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합쳤다
가장 강력한 순간은 이 모든 접점이 하나로 합쳐질 때다. 페라리는 F1 그랑프리 현장에서 'Casa Ferrari' 팝업을 운영한다. 마이애미에서는 호텔 전체를 점거해 주말 내내 레이싱, 신차 발표, 패션 컬렉션을 하나의 경험으로 통합했다. 레이싱을 보러 온 사람이 옷을 사고, 옷을 보러 온 사람이 레이싱에 빠진다. 경계가 없다. 이건 팝업 매장이 아니라 '일시적 세계관'이다. 세계관이 설계되어 있으니까 가능한 구조다. 제품만 있었다면 불가능하다.
접점은 넓히되, 접점의 밀도는 높인다. 이것이 페라리가 '차를 더 만들지 않고도 성장하는' 방정식이다.
숫자가 증명하는 것
이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는 성장률의 격차에서 나타난다. 2024년 차·부품 매출은 57억 2,800만 유로(+11.9%), 브랜드·라이프스타일 매출은 6억 7,000만 유로(+17.1%). 2025년 1분기에는 라이프스타일 관련 매출 성장률이 32.1%까지 치솟았다. 차 매출 성장률의 세 배다.
아직 전체의 10% 수준이다. 하지만 이 속도에는 복리가 작동한다. 차 매출은 생산량 제한이라는 천장이 있다. 라이프스타일에는 그 천장이 없다. 패션, 레스토랑, 부티크, 레지던스, 뮤지엄. 확장 가능한 영역이 계속 생긴다. 페라리가 2025년 가이던스에서 "라이프스타일 활동의 매출 성장률을 확대하면서 개발을 가속화하고 네트워크를 넓히겠다"고 선언한 이유다.
페라리의 매출총이익률은 2024년 약 50%에 달했다. GM의 약 다섯 배이며, 럭셔리 패션 하우스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고수익, 가격 결정력, 강한 현금 흐름,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는 브랜드 자산. 이 비즈니스의 특성은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 럭셔리 복리 성장 기업의 것이다.
페라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전환은 럭셔리 자동차 업계 전체로 퍼지고 있다. 벤틀리는 마이애미에 61층 레지던스를 짓고, 포르셰 디자인 타워는 가동 중이며, 애스턴 마틴 레지던스는 2024년 5월 개관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두바이에 첫 브랜디드 레지던스를, 람보르기니는 스페인 마르베야에 빌라 단지를 선보인다.
흥미로운 데이터가 하나 있다. 포르셰 디자인 매장에서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산 고객의 23%가 3년 이내에 포르셰 차량을 구매한다. 라이프스타일이 본업의 세일즈 퍼널이 되는 것이다. 선글라스를 사면서 '포르셰적 삶'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결국 차까지 산다. 역방향으로도 작동한다. 차를 산 사람이 레지던스를 산다. 세계관 안에서 소비의 깊이가 끝없이 깊어지는 구조.
현대차의 제네시스도 같은 논리로 움직인다. 뉴욕 미트패킹에 제네시스 하우스를 열어 한식 파인다이닝과 문화 공간을 운영하고, 2024년에는 미슐랭 가이드와 협업해 햄튼스 다이닝 경험을 선보였다. 미국 시장의 신생 브랜드가 인지도를 쌓는 방법으로 광고 대신 '문화적 경험'을 택한 것이다.
당신의 브랜드에는 '다움'이 있는가
페라리의 '다움'은 희소성, 장인 정신, 속도에 대한 낭만, 이탈리아적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엔진이 전기로 바뀌어도, 패션 트렌드가 바뀌어도, 세대가 바뀌어도 남는다. 차는 그 '다움'의 가장 극적인 표현일 뿐이다. 옷도, 음식도, 공간도 '다움'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다. 페라리가 지금 하는 일은 표현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이다.
한국의 프리미엄 브랜드들 — K-뷰티든, K-패션이든, K-푸드든 — 은 대부분 제품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 성분이 좋고, 디자인이 예쁘고, 가성비가 뛰어나다. 그건 '다움'이 아니라 '사양(spec)'이다. 사양은 복제할 수 있다. '다움'은 복제할 수 없다.
명품이 물건을 파는 시대는 끝났다. 명품은 이제 '다움'을 판다. 페라리는 그 설계를 이미 시작했다.
이동철 | 하이엔드캠프 대표 | highendcamp@gmail.com
ⓒ 하이엔드전략연구소(HESI) & 하이엔드데일리
페라리는 자동차 회사인가. CEO 베네데토 비냐의 답은 명확하다. "우리는 자동차도 만드는 럭셔리 회사입니다(We are a luxury company that is also doing cars)." '자동차도'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차가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선언이다.
이건 겸손이 아니다. 냉정한 산술이다.
왜 그들은 바뀌어야 했나
13,752대의 딜레마
페라리가 2024년에 판 차는 13,752대. 그런데 시가총액은 약 750억 달러로, 수백만 대를 찍어내는 포드나 GM의 1.5배에 달한다. 이 비정상적인 밸류에이션은 단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희소성.
창업자 엔초 페라리는 "시장이 원하는 것보다 한 대 적게 만들어라"는 원칙을 세웠고, 경영진은 지금도 이 원칙을 따른다. 생산을 제한해 대기 명단을 유지하고, 리세일 가치를 높이며, 브랜드의 신비감을 강화하는 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차를 더 만들면 단기 매출은 오르지만 희소성이 무너진다. 희소성이 무너지면 페라리는 그냥 '비싼 차'가 되고, '비싼 차'는 가격 경쟁에 노출된다. 그 순간 750억 달러의 근거가 사라진다. 차는 더 만들 수 없다. 그런데 투자자는 성장을 원한다. 이 모순을 푸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차가 아닌 곳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엔진이 사라지는 시대
더 근본적인 위기도 있다. 페라리의 핵심 감성 — V12 엔진 사운드, 기어 변속의 충격, 배기음의 진동 — 은 모두 내연기관에서 나온다. 페라리는 2026년 말까지 판매 차량의 약 60%를 하이브리드 또는 전기차로 전환할 계획이지만, 소리와 감정, 드라이빙 경험을 타협하지 않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 모터가 V12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엔진이 바뀌어도 살아남는 것은 '제품의 성능'이 아니라 '브랜드의 세계관'이다. 패션, 레스토랑, 뮤지엄, 부티크. 이 모든 접점에서 '페라리다움'이 작동하고 있다면, 엔진이 사라진 뒤에도 브랜드는 산다. 지금의 라이프스타일 확장은 사업 다각화가 아니다. 엔진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험이다.
85만 명이 13,752명보다 중요한 역설
페라리 연차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라이프스타일은 우리가 하는 일의 핵심 부분이다. 많은 팬에게 이것이 페라리 세계로 들어오는 진입점이 되기 때문이다." 2024년 마라넬로와 모데나의 페라리 뮤지엄 방문객은 85만 명 이상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85만 명. 연간 차 구매자의 60배다. 이들 대부분은 페라리를 살 수 없다. 하지만 뮤지엄에서 감동받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부티크에서 가방을 산다. 이들의 소비가 매출이 되는 동시에, 이들의 열망이 페라리를 둘러싼 문화적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가 다시 차의 프리미엄을 높인다.
"페라리의 브랜드가 특별한 건 인지도가 아니라 '허락(permission)'이다. 가격을 올리고 접근을 제한하면서도 수요가 늘어난다. 이것이 럭셔리 경제학의 본질이다." 이 '허락'은 열망의 층위가 두꺼울수록 견고해진다. 차만 파는 브랜드는 열망이 한 겹이다. 패션, 레스토랑, 뮤지엄, 부티크까지 경험할 수 있는 브랜드는 여러 겹이다. 층위가 두꺼울수록 가격 프리미엄은 공고해진다.
정리하면 세 가지다. 차는 더 만들 수 없는데 성장해야 한다. 엔진이 사라져도 살아남아야 한다. 차를 살 수 없는 팬까지 브랜드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 세 개의 압력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 페라리는 '차를 파는 회사'에서 '페라리다움을 파는 회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떻게 바뀌었나
먼저 줄였다
과거 페라리의 '라이프스타일'은 솔직히 형편없었다. 공항 면세점에서 로고 박힌 열쇠고리와 볼펜을 파는 수준. 브랜드를 소모하는 행위였다. 페라리는 2018년 이후 라이선스 수를 대폭 줄이고, 유통 네트워크를 리뉴얼하며, 럭셔리 업계 출신 인재를 영입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핵심은 '줄인다'는 것이다. 로고 갖다 붙이는 라이선스를 줄이고, 직접 기획하고 직접 파는 구조로. 단기적으로는 매출을 포기하는 결정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가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공장 조립 라인 위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2019년 아르마니·돌체앤가바나 출신의 로코 이아노네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외부에 라이선스를 주는 대신 자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페라리의 디자인 언어를 패션으로 번역하는 구조를 세운 것이다.
첫 패션쇼는 2021년, 마라넬로 본사 V12 조립 라인 위에서 열렸다. 이 장소 선택이 의미심장하다. 파리나 밀라노의 화려한 공간이 아니라, 엔진이 조립되는 공장이다. '이 옷은 엔진을 만드는 손에서 나왔다'는 메시지. 옷과 차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다. 이후 매 시즌 밀라노 패션위크 정규 무대에 서고 있고, 2026년 가을 컬렉션으로 이아노네의 10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시범 사업이었다면 3시즌 만에 접었을 것이다. 10시즌이면 본업이다.
마이애미 그랑프리 기간에는 파에나 호텔을 통째로 빌려 페라리 오너를 위한 갈라를 열었는데, 최대 3만 5,000유로(약 5,000만 원)짜리 데미쿠튀르 의상 30벌이 완판됐다. 자동차 행사에서 옷이 팔린다. 세계관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식탁 위에 브랜드를 올렸다
마라넬로 본사 앞 리스토란테 카발리노는 세계 최고의 셰프 마시모 보투라와 협업해 2021년 재개장했고, 2025년 11월 미슐랭 1스타를 획득했다. 이 공간 자체가 전설이다. 1950년 엔초 페라리가 공장 식당으로 열었고, 여기서 니키 라우다와 점심을 먹고, 그랑프리를 지켜보고, 고객을 접대했다. 그 역사적 공간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테이스팅 메뉴는 페라리 슈퍼카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각 코스에 288 GTO, F40, F50, 라페라리, F80 같은 차 이름이 붙어 있으며, 페라리 디자인센터와 공동 개발했다. 디저트 중 하나는 실제 페라리 차체 금형을 본뜬 몰드로 만들어진다. 이건 끼니가 아니라 감각의 기억이다.
왜 하필 레스토랑인가. 차는 수년에 한 번 산다. 옷은 시즌에 한두 번 산다. 레스토랑은 수시로 간다. 접촉 빈도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식사는 반드시 '함께 하는 경험'이다. 혼자 차를 모는 것과 달리, 식사는 동행자와 공유된다. 한 사람의 감동이 두 사람, 네 사람으로 번진다. 가장 낮은 비용으로 가장 넓은 감정적 파급력을 만드는 접점이 식탁이다.
매장은 늘리되, 주소로 승부한다
현재 전 세계 14개 페라리 패션 매장. 뉴욕과 마이애미에 신규 매장이 예정되어 있고, 로마 매장은 스페인 계단으로 이전한다. 런던도 파이프라인에 있다. 14개. SPA 브랜드라면 한 도시에 낼 숫자다. 그런데 페라리는 전 세계에 14개만 둔다.
"매장 수가 차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올바른 위치가 차이를 만든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로마 스페인 계단. 뉴욕. 마이애미. 런던. 매장 자체가 브랜드 메시지다. 연간 13,752대만 만드는 브랜드가 매장을 수백 개 낼 수는 없다. 물건의 희소성과 접점의 희소성이 동기화되어야 세계관이 유지된다.
모든 접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합쳤다
가장 강력한 순간은 이 모든 접점이 하나로 합쳐질 때다. 페라리는 F1 그랑프리 현장에서 'Casa Ferrari' 팝업을 운영한다. 마이애미에서는 호텔 전체를 점거해 주말 내내 레이싱, 신차 발표, 패션 컬렉션을 하나의 경험으로 통합했다. 레이싱을 보러 온 사람이 옷을 사고, 옷을 보러 온 사람이 레이싱에 빠진다. 경계가 없다. 이건 팝업 매장이 아니라 '일시적 세계관'이다. 세계관이 설계되어 있으니까 가능한 구조다. 제품만 있었다면 불가능하다.
접점은 넓히되, 접점의 밀도는 높인다. 이것이 페라리가 '차를 더 만들지 않고도 성장하는' 방정식이다.
숫자가 증명하는 것
이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는 성장률의 격차에서 나타난다. 2024년 차·부품 매출은 57억 2,800만 유로(+11.9%), 브랜드·라이프스타일 매출은 6억 7,000만 유로(+17.1%). 2025년 1분기에는 라이프스타일 관련 매출 성장률이 32.1%까지 치솟았다. 차 매출 성장률의 세 배다.
아직 전체의 10% 수준이다. 하지만 이 속도에는 복리가 작동한다. 차 매출은 생산량 제한이라는 천장이 있다. 라이프스타일에는 그 천장이 없다. 패션, 레스토랑, 부티크, 레지던스, 뮤지엄. 확장 가능한 영역이 계속 생긴다. 페라리가 2025년 가이던스에서 "라이프스타일 활동의 매출 성장률을 확대하면서 개발을 가속화하고 네트워크를 넓히겠다"고 선언한 이유다.
페라리의 매출총이익률은 2024년 약 50%에 달했다. GM의 약 다섯 배이며, 럭셔리 패션 하우스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고수익, 가격 결정력, 강한 현금 흐름,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는 브랜드 자산. 이 비즈니스의 특성은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 럭셔리 복리 성장 기업의 것이다.
페라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전환은 럭셔리 자동차 업계 전체로 퍼지고 있다. 벤틀리는 마이애미에 61층 레지던스를 짓고, 포르셰 디자인 타워는 가동 중이며, 애스턴 마틴 레지던스는 2024년 5월 개관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두바이에 첫 브랜디드 레지던스를, 람보르기니는 스페인 마르베야에 빌라 단지를 선보인다.
흥미로운 데이터가 하나 있다. 포르셰 디자인 매장에서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산 고객의 23%가 3년 이내에 포르셰 차량을 구매한다. 라이프스타일이 본업의 세일즈 퍼널이 되는 것이다. 선글라스를 사면서 '포르셰적 삶'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결국 차까지 산다. 역방향으로도 작동한다. 차를 산 사람이 레지던스를 산다. 세계관 안에서 소비의 깊이가 끝없이 깊어지는 구조.
현대차의 제네시스도 같은 논리로 움직인다. 뉴욕 미트패킹에 제네시스 하우스를 열어 한식 파인다이닝과 문화 공간을 운영하고, 2024년에는 미슐랭 가이드와 협업해 햄튼스 다이닝 경험을 선보였다. 미국 시장의 신생 브랜드가 인지도를 쌓는 방법으로 광고 대신 '문화적 경험'을 택한 것이다.
당신의 브랜드에는 '다움'이 있는가
페라리의 '다움'은 희소성, 장인 정신, 속도에 대한 낭만, 이탈리아적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엔진이 전기로 바뀌어도, 패션 트렌드가 바뀌어도, 세대가 바뀌어도 남는다. 차는 그 '다움'의 가장 극적인 표현일 뿐이다. 옷도, 음식도, 공간도 '다움'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다. 페라리가 지금 하는 일은 표현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이다.
한국의 프리미엄 브랜드들 — K-뷰티든, K-패션이든, K-푸드든 — 은 대부분 제품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 성분이 좋고, 디자인이 예쁘고, 가성비가 뛰어나다. 그건 '다움'이 아니라 '사양(spec)'이다. 사양은 복제할 수 있다. '다움'은 복제할 수 없다.
명품이 물건을 파는 시대는 끝났다. 명품은 이제 '다움'을 판다. 페라리는 그 설계를 이미 시작했다.
이동철 | 하이엔드캠프 대표 | highendcamp@gmail.com ⓒ 하이엔드전략연구소(HESI) & 하이엔드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