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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게, 예거 르쿨트르 같은 전통 강자들을 ‘흘러간 노래’로 전락시킨, 2075년에서 온 시계 '웰더'

시계업계는 전통이 중요한 산업이다. 오랜 역사가 곧 품질과 직결된다. 바셰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1755년 설립), 브레게 Breguet(1775년 설립), 예거 르쿨트르Jaeger-Le Coultre(1833년 설립)처럼 2백 년 정도의 역사를 자랑해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물론 ‘신참’ 주제 에 선전한 경우도 있긴 하다. 샤넬Chanel, 구찌Gucci 같은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색다른 디자인과 타 업종에서 쌓은 브랜드력으로 성공한 경우 다. 주얼리 브랜드 까르티에 Cartier는 자신들의 강점을 살려 보석이 박힌 시계와 보관 케이스를 디자인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전문성이 강한 분야라서 역사와 기술을 내세운 전통 브랜드들의 아성은 여전하다.

그런데 역사도 기술도 브랜드력도 갖추지 못한 한 회사가 혜성처럼 등장해, 좀처럼 변할 것 같지 않던 시계업계의 판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 주인공은 이탈리아의 시계 브랜드 ‘웰더’다. 웰더는 시계업계에서 비싸지 않은 ‘합리적인 가격의 명품 affordable luxury’을 지향하는데, 기존 브랜드와는 완전히 차별화된 포지셔닝이다. 유명 시계업체들이 ‘과거의 전통’에 매달릴 때 웰더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존 브랜드들은 장인들의 수공 작업이나 뛰어난 기술력 등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아왔다. 예를 들어 바셰론 콘스탄틴은 오랜 시간 한 곳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는 장인들을 ‘작은 방의 기술자’라고 지칭하며 장인이 만든 작품임을 강조하고, 브레게는 ‘시계를 통한 문화적 영감과 기술적 충격’을 브랜드 철학으로 삼고 있다. 웰더는 다르다. 일단 이름부터가 그렇다. 웰더의 뜻은 용접공. 


부속 하나하나를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조립한다고 주장해도 모자랄 판에 용접이라니,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름에 담긴 의미가 퍽 그럴싸하다. 인류는 탄생 이래 지금까지 사람들이 가진 느낌, 감정, 관심, 아름다움을 하나로 ‘용접’하면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시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웰드, 즉 용접이란 과거와 미래를 잇고, 고객과 제품을 연결하며, 고객과 번영을 하나로 만든다는 의미로, 단순한 접착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일체화’를 뜻한다. 소비자의 니즈에 부합하는 시계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면 웰더는 어떻게 소비자의 니즈와 강력한 일체화를 이루는 제품을 만들고 있을까? 어떤 업계나 불문율처럼 여겨지는 원칙이 있다. 시계업계에서는 그것이 용두(태엽을 감는 꼭지)의 방향이다. 디자인과 기능이 각기 다른 시계들이 모두 용두만은 오른쪽에 둔다. 대부분의 사람이 오른손잡이임을 감안해 시곗바늘을 맞추기 편하도록 디자인한 데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곗바늘을 맞추기 위해 용두를 돌리는 일은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에 불과하다. 오히려 원치 않는 자국을 손등에 남기거나 괜히 거치적거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웰더는 용두를 왼쪽으로 옮겨버렸다. 틀에 박힌 불문율을 과감히 깨고 고객의 불편을 해소한 것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웰더의 역발상이 돋보이는 점은 따로 있다. 그간 시계들은 Since와 설립 연도를 적으며 자신들이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내세웠다. 명품 시계들이 보통 150년에서 18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상황에서, 신흥 주자의 숫자는 초라하기 그지없을 수밖에. 그런데 웰더의 시계에는 ‘Since 2075’라고 적혀 있다. 아직 오지도 않은 2075년부터 시작된 시계라니, 미래에서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 사실 웰더의 창립 연도는 2007년인데, 어차피 밝혀봤자 이득 될 것 없는 숫자를 과감히 버리고, ‘우리는 고객에게 2075년의 앞선 디자인을 제공한다’는 접근방법을 취한 것이다. 웰더의 고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디자인과 기술력의 시계를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당당함이라니!

실제로 웰더의 시계는 <에이리언>과 같은 미래 공상과학 영화에나 어울릴 듯한 디자인이다. 그들은 “만약 당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떨어진다면 오직 웰더만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디자인일 것”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시계 케이스 역시 독특하다. 기존 케이스 디자인과는 확연히 다르다. 공구함을 닮은 이 케이스는 모두가 예쁘고 럭셔리한 디자인을 추구할 때, 마치 멍키스패너가 튀어나올 것 같은 엉뚱함으로 신선한 매력을 선사한다.

과거의 유산 대신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고, 세련된 척 폼 잡는 대신 거칠어도 솔직한 모습으로 어필하는 브랜드, 웰더. 모두가 지켜온 불문율을 단숨에 격파하는 창조적 파괴와 기존 법칙들과 반대로 가는 창조적 역주행이 바로 전통 강자들이 버티고 있는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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