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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바이오 4강은 각자의 무기를 골랐다 — 한국의 무기는 무엇?

싱가포르·중국·일본·대만 바이오 주권 선언, K-바이오의 전략은?
네 나라가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무기가 전부 다르다. 싱가포르는 인재를 골랐다. 중국은 속도를 골랐다. 일본은 자본의 문을 열었다. 대만은 반도체 DNA를 접목시켰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바이오의약품 공장을 짓고, 이미 설계한 약을 대신 만들어주는 영역에서 더욱 전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같은 아시아, 완전히 다른 네 가지 전략
먼저 지도를 펼쳐보자. 2026년 현재, 아시아 바이오텍의 지형은 놀랍도록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이 네 나라의 전략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내부 논리와 진행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싱가포르는 가장 전격적인 선택을 했다. 인구 600만의 도시국가가 5년간 370억 싱가포르달러(약 38조 원)를 투입하는 RIE2030을 발표하면서, 핵심 키워드로 '이중언어형 과학자' - AI와 생명과학을 동시에 설계할 수 있는 인재 - 를 내세운 것이다. 약을 많이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약을 만드는 방법 자체를 설계하는 사람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모더나의 배후 벤처 빌더인 Flagship Pioneering이 A*STAR과 손잡고 최대 1억 싱가포르달러를 투입해 아태 허브를 싱가포르에 열기로 한 것은 이 전략의 가시적 결과물이다. 노바르티스의 2.5억 달러 생산시설 확장, 화이자의 10억 달러 신공장도 같은 맥락이다. 싱가포르의 베팅은 명확하다. 규모가 아니라 두뇌에 배팅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정반대 방향에서 출발해 같은 목표에 도달했다. 10년 전만 해도 중국 바이오텍은 '저비용 제조기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3SBio, CSPC 같은 기업들이 글로벌 빅파마에 1,200억 달러 이상의 라이선싱 딜을 체결했고, 2025년 홍콩에서만 13개 바이오텍이 Chapter 18A를 통해 총 500억 홍콩달러를 조달했다. 항셍 혁신 의약지수는 1년간 약 70% 급등했다. 중국 바이오텍의 무기는 압도적인 속도와 규모다. 서구보다 낮은 비용, 빠른 개발 타임라인, 그리고 점점 호환 가능해지는 임상 데이터. 세포·유전자치료(CGT) 임상시험 건수에서는 이미 서구를 앞질렀다. 
일본은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구조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정부가 J-RISE 이니셔티브를 출범시키고 스타트업 지원에 3,500억 엔(약 3조 원)을 투입했다. AMED(일본의학연구개발기구)는 VC 투자금을 2배로 매칭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AN Venture Partners가 2억 달러 규모의 일본 중심 바이오텍 펀드를 클로징했고, 도쿄대학 UTEC는 운용자산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일본 바이오 관련 시장 규모는 약 6.8조 엔으로 꾸준히 성장 중이며, 합성생물학 시장만 2040년까지 57억 달러 규모로 성장이 전망된다. 일본의 무기는 초고령사회가 만들어낸 절박한 내수 수요와, 그 수요를 기반으로 투자를 하고 하는 자본들 이다.
대만의 전략은 네 나라 중 가장 독특하다. TSMC라는 걸출한 기업으로 반도체와 ICT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그 DNA를 바이오에 이식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25년 기술 예산을 전년 대비 14.9% 증액한 약 46억 달러로 편성하면서, ADC(항체-약물 접합체)의 항체 엔지니어링과 링커 기술에서 경쟁 우위를 구축하고 있다. 재생의학법을 통과시켜 CAR-T 치료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고, 아시아 최초의 Pharma 4.0 CDMO인 TBMC를 설립했다. 대만의 무기는 '정밀 제조'다 — 반도체를 나노미터 단위로 깎아온 경험을, 분자 수준의 약물 설계에 적용하겠다는 논리다.
네 나라의 공통점은 하나다. 모두 '남이 만든 약을 대신 만들어주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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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의 바이오는?
사실 숫자만 보면 한국은 꽤 잘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의약품 CDMO(위탁개발생산) 기업이다. 셀트리온은 바이오시밀러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연간 기술수출 규모는 20조 원을 넘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혈뇌장벽(BBB) 투과 플랫폼으로 사노피, GSK, 릴리와 연속 파트너십을 체결했고, 유한양행-오스코텍의 렉라자(Leclaza)는 한국 기업이 개발한 최초의 FDA 승인 항암제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2026년은 "국내 바이오텍의 FDA 승인과 기술수출이 줄줄이 나올 수 있는 원년"이라는 증권가의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이 성과들을 아시아 4강의 전략과 나란히 놓으면, 불편한 질문이 떠오른다.
한국의 가장 큰 성공은 '제조'다. 어쩌면 향후 바이오형 TSMC에 가장 가까운 모델이 한국에 있는지도 모른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송도 공장클러스터는 총 60만 리터 이상의 생산능력을 자랑한다. 셀트리온은 미국 공장 인수를 추진 중이다. 글로벌 빅파마의 공급망 재편과 중국 리스크 헤지 수요가 맞물리면서, 한국 CDMO 기업들은 구조적 수혜를 받고 있다. 미국의 바이오시큐어법은 중국 CDMO에 의존하던 빅파마들의 시선을 한국으로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분명한 기회다. 하지만 '기회'와 '주권'은 다른 단어다. CDMO는 본질적으로 남이 설계한 약을 대신 만들어주는 사업이다. 주문이 들어오면 만들고, 주문이 끊기면 비어 있는 공장이 남는다. 물론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단순 위탁생산을 넘어 '위탁개발'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고, 바이오시밀러 사업도 자체 허가와 판매를 포함한다. 그러나 가치사슬의 최상단 - 어떤 질병을 타겟할 것인가, 어떤 분자를 설계할 것인가, 어떤 환자 데이터로 가설을 세울 것인가 - 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아직 미미하다.
싱가포르가 약을 설계하는 '두뇌'를 키우고, 중국이 자체 혁신 신약을 글로벌 빅파마에 역수출하고, 일본이 초고령사회 솔루션으로 세계에 팔 무기를 만들고, 대만이 반도체 정밀도를 분자 수준에 적용하는 동안 -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공장'을 짓고 있다. 최고급 공장을 만들지, 두뇌를 키울지에 대한 선택의 여지는 아직 남아있다. 


'K-바이오 대도약 전략'의 야심과 빈칸
정부도 이 격차를 인식하고 있다. 'K-바이오의약산업 대도약 전략'은 2030년까지 바이오의약품 수출 2배 달성, 블록버스터급 신약 3개 창출, 글로벌 임상시험 3위 달성을 목표로 내세운다. 2026년에는 임상 3상 특화 펀드가 출시될 예정이고, 임상 진입 간소화, 비대면 임상 제도화, 신속 심사 등 규제 개선도 추진된다. AI 신약개발 지원과 데이터 활용 활성화도 포함되어 있다.
방향은 맞다. 하지만 이 전략을 아시아 4강의 플레이와 비교하면, 부족한 빈칸이 보인다.
첫 번째 빈칸은 '인재 설계'다. 싱가포르가 38조 원의 핵심을 '이중언어형 과학자'에 걸었다면, 한국의 전략에서 인재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 대학의 학과 칸막이는 여전히 높다. 생물학과 학생이 머신러닝 수업을 청강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두 분야를 동등한 깊이로 훈련받는 구조적 경로는 드물다. AI를 '활용하는' 바이오 과학자는 늘어나고 있지만, AI로 '사고하는' 바이오 과학자 — 싱가포르가 찾는 바로 그 인재 — 의 양성 시스템은 부재하다.
두 번째 빈칸은 '고유한 수요'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사회라는 '문제'를 바이오 혁신의 '엔진'으로 전환했다. RIE2030의 그랜드 챌린지가 '건강한 장수의 극대화'인 것도, 일본이 재생의학과 뇌과학에 집중하는 것도 이 맥락이다. 한국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절박한 내수 수요가 글로벌 바이오 혁신의 동력으로 전환되는 경로가 설계되어 있는가? 한국의 건강보험 데이터는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실세계 근거(Real-World Evidence)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데이터가 AI 신약개발의 입력값으로 체계적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아직 초기 단계다.
세 번째 빈칸은 '이야기'다. 중국 바이오텍의 글로벌 부상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술력만이 아니다. "중국 혁신 신약이 글로벌 빅파마에 역수출되고 있다"는 내러티브가 홍콩 IPO 시장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대만이 "반도체 DNA를 바이오에 이식한다"는 스토리는 ADC 밸류체인에서의 정밀 포지셔닝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세계 최고의 공장"은 좋은 이야기이지만, 투자자와 과학자를 끌어당기는 이야기는 아니다. 돈은 효율을 따라가지만, 인재는 비전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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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이오 단순 생산기지를 넘어서려면
한국 바이오의 다음 단계를 위한 힌트는 이미 한국 안에 있다.
에이비엘바이오의 '그랩바디-B' 플랫폼은 한국 바이오텍이 제조를 넘어 플랫폼 기술로 글로벌 빅파마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노피, GSK, 릴리가 연속으로 파트너십을 체결한 것은 단순한 기술수출이 아니라, 한국발 원천 기술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신호다. 리가켐바이오의 ADC 기술, 오름테라퓨틱의 단백질 분해 플랫폼, 올릭스의 RNA 치료 전략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문제는 이런 성공 사례가 아직 개별 기업의 탁월함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아니라 예외다. 싱가포르는 바이오폴리스라는 물리적 클러스터 위에 RIE2030이라는 인재 설계도를 올렸다. 중국은 4개의 바이오 지역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규제 개혁, 해외 귀국 인재, 로컬 VC가 맞물리는 생태계를 만들었다. 일본은 J-RISE와 AMED 매칭 그랜트라는 제도적 프레임워크로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는 구조를 설계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더 큰 공장이 아니다. 공장을 넘어서는 시스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 가지다.
하나, 오랜 기간 축적된 건강보험 데이터를 AI 신약개발의 국가 인프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국이 가진 세계 최고 수준의 실세계 데이터는, 적절한 제도적 프레임워크만 갖추면, 글로벌 바이오텍이 한국에서 임상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데이터가 돈이 되는 시대에, 데이터를 쥐고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은 금광 위에 공장을 짓는 것과 같다.
둘, 학과 칸막이를 넘는 융합 인재 경로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이중언어형 과학자'가 한국에서 태어나려면, 생물학과 컴퓨터과학의 이중 학위가 예외가 아니라 경로로 존재해야 한다. 의과대학에서 코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두 언어를 동시에 배우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셋, '한국이 이 약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라는 이야기를 갖는 것이다. 대만이 "반도체 정밀도"를, 이스라엘이 "군사 기술의 의료 전환"을 자국 바이오의 내러티브로 삼듯이, 한국에도 고유한 서사가 필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사회, 세계 최고의 디지털 의료 인프라, 세계 최대의 건강보험 데이터. 이 세 가지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한국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약"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주권이란, 남이 시킨 일을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한국 바이오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실행자(executor)다. 다음 질문은 간단하다 — 설계자(architect)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5 Key Signals
Signal 1 | 아시아 4강의 무기 싱가포르 = 인재(이중언어형 과학자). 중국 = 속도(1,200억 달러 라이선싱). 일본 = 자본 개방(3,500억 엔 스타트업 지원). 대만 = 정밀 제조(반도체 DNA의 바이오 이식).
Signal 2 | 한국의 현재 포지션 CDMO 세계 최강, 기술수출 20조 원 역대 최고. 하지만 가치사슬 최상단(분자 설계, 타겟 선정, 데이터 기반 가설 수립)에서의 존재감은 초기 단계.
Signal 3 | 바이오시큐어법의 이중 효과 중국 CDMO 의존을 줄이려는 빅파마의 수요가 한국으로 유입. 구조적 수혜이지만, 동시에 '고급 하청' 구조를 고착시킬 위험.
Signal 4 | 사용하지 않는 금광 한국 건강보험 데이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실세계 근거. AI 신약개발의 국가 인프라로 전환하면, 글로벌 바이오텍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될 수 있음.
Signal 5 | 설계자가 되려면 필요한 것은 더 큰 공장이 아니라, 융합 인재 경로의 제도화, 데이터 인프라의 개방, 그리고 '한국이 아니면 안 되는 약'이라는 고유한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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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안 | 하이엔드전략연구소장 | hesi.research@gmail.com ⓒ 하이엔드전략연구소(HESI) & 하이엔드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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